세관당국 원산지 조사 공문 입수해 살펴보니
은행계좌내역, 세무보고서, 회계장부까지 요구
페루 기업들 "영업비밀까지 내라고 하나" 불만
문맹 페루농민에 '재배명세서' 제출하라 통보
전문가들 "전형적인 관세행정 편의주의"
관세청이 페루산 녹두를 수입하는 기업에 관세추징을 통보한 근거는 ‘원산지 증빙 미비’다. FTA 협정에 따르면 국내기업이 원산지 증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게 세관당국 주장이다. 또 녹두생산량이 적던 페루가 갑자기 많은 양을 수출한 만큼 인접국에서 밀수한 녹두일 가능성은 없는지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원산지 검증에 현지기업 영업비밀 요구한 세관당국
하지만 아시아경제가 세관당국의 조사공문을 입수해 들여다보니, 오히려 관세청의 부실한 조사와 공직사회의 행정 편의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업들은 관세청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 토로한다. 1차 조사에서 제출해야 할 서류를 정확히 제시하지 않고 ‘원산지를 증빙할 서류’를 내라고만 안내했다는 것이다. FTA 조문에도 어떤 서류를 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아 자체적으로 만들어 냈는데, 이를 문제 삼아 곧바로 2차 조사를 시작했다.
2차 조사에서는 제출해야 할 자료 리스트를 통보했는데 사실상 받아내기 불가능한 자료였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목소리다. 실제 세관당국이 페루의 녹두 수집상, 농업법인, 재배농민에게 요구한 ‘원산지 검증 통지서’에는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자료가 다수 포함됐다. 기업의 최근 4년치 회계장부나 은행 송금내역, 송금날짜를 포함한 월별 계좌내역이 대표적이다. 특히 관세청은 기업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세무보고서(tax affairs report)도 요구했다.
문제는 페루기업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래국인 한국에 자신의 회계·세무 자료를 제출하면 매출·영업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설령 관세청 요구를 거절한다 해도 페루기업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FTA 원칙상 원산지를 증명해야 할 의무는 수입기업에 있다. 한국 정부가 요구하고 페루 기업이 거부했는데, 세금 폭탄은 국내 기업이 받게 된 셈이다.
이에 관세추징을 피하려는 민간기업들이 세관 대신 자료를 받아내러 페루기업을 설득하러 가는 사태도 빚어졌는데 대부분 실패했다. 한 수입기업 관계자는 “만약 외국 관세청이 우리 대기업한테 은행 계좌내역이나 세무보고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순순히 제출했겠느냐”면서 “페루에 직접 가서 사정도 해보고 강한 어조로 얘기해도 왜 우리가 그런 정보까지 내놔야 하느냐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한국 농부도 안쓰는데…글 모르는 페루농민에게 '재배명세서' 받아내야
페루 농민에게 요구한 재배명세서(Statement of Cultivation)도 마찬가지다. 재배명세서란 언제 어떤 품종을 심었고, 얼마나 수확했는지 적어놓은 기록물이다. 다른 수입기업 관계자는 “내가 직접 부탁을 하려고 페루 농장에 갔는데 거기 농민이 맨발로 일하고 글도 쓸 줄 모르더라”면서 “한국 농민들도 안 적는 영농일지를 글도 모르는 페루 사람한테 받아오라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관세청은 국내 농업기업과 농민들에게는 이같은 자료를 구비하라고 안내하지 않는다. 관세청 국제협력총괄과와 한국관세사회가 배포한 FTA 질의답변 모음집에 따르면 한국산 쌀을 입증하는 자료의 예시로 ‘친환경농산물 인증서’나 ‘농산물우수관리 인증서’ 정도를 꼽는다. 농업기업의 세무보고서가 필요하다거나 농민들이 재배명세서를 써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관세청이 무리한 자료요구를 고집하는 건 ‘페루에서 갑자기 녹두생산량이 늘었다’는 의심 탓이다. 페루는 원래 녹두를 생산하는 나라가 아닌데 무관세가 적용된 시점부터 갑자기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느냐는 주장이다. 특히 2020년 1717톤이던 녹두생산량은 2021년 9696톤으로 급증했다. 이에 관세청은 인접한 볼리비아나 브라질에서 재배된 녹두가 밀수꾼을 거쳐 페루로 들어왔을 의심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지 기업들은 페루 상황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일축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페루는 ‘신이 주신 땅’이라 불릴 만큼 토양 질이 좋다. 2007년 처음 블루베리 종자 도입 때 생산량이 세계 최하위였지만, 4~5년 만에 전 세계 1위에 올랐을 정도다. 또 다른 수입기업 관계자는 “쌀농사를 짓는 페루 농민들이 벼를 수확한 땅에 녹두를 심으면 3개월 만에 재배해 부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며 “관세청도 갑자기 늘어난 녹두가 페루산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밀수증거 못 찾았지만 관세추징 그대로…"행정 편의주의" 지적도
페루 정부와 현지 관계자, 수입기업들은 녹두 밀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이다. 녹두 생산량이 충분한데 밀수를 시도할 사람이 없을뿐더러 지형상으로도 불가능해서다. 페루는 볼리비아·브라질과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세 국가 간 밀수 무역은 울창한 밀림이나 강에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보따리상이 보석·마약·담배 등 부피 대비 단가가 비싼 물품을 들여온다. kg당 가격이 1~2달러에 불과한 녹두로 밀수이득을 얻으려면 차량 수십대를 동원해야 하는데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에 관세청의 경직적 업무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전직 관세청 직원은 “세관당국은 위계질서가 명확하고 보수적인 조직”이라면서 “원산지 증빙을 못 했다면서 현지 출장까지 다녀와 관세추징까지 결정한 사안인데 자신들의 조사와 행정방식의 일부 하자를 인정하고 결과를 수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문언에 따라 송금내역과 세무보고서 등의 자료까지 봐야 증빙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관세행정의 ‘편의주의’라는 비판도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관세청도 기업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행정을 해야지 과도한 자료에 집착하는 건 옳지 않다”면서 “본인들의 편의를 위한 행정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세종=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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